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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후손들 끼리 쌈질이나 하고, 소송이나 하더니 이젠 후손들도 잘 찾지 않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장군께서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죠, 제실을 지을 때는 봄에 시작하여 목수 세 명이 그 당시에는 연장이라고는 자귀와 대패, 망치만으로 7월까지 했으니까 5개월 정도 걸렸지요. 제실을 짓고 5~6년후에 해방이 되었으니 1930년경에 제실을 지었다.
장군께서는 시신을 수습 할 수 없어 밤나무를 깎아서, 그기에 장군의 함자를 기록하고 혼백을 모셔와 토관에 장사 지냈다고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었다 한다..
그 전설 같은 이야기는 다음에 듣기로 한다. 어쨌거나 장군께서 돌아가시고
오랜 이후에 조정에서 상소를 받아들여 충의공이란 시호를 하사 하시고 병조판서를 추징하시며, 훌륭한 지관을 시켜 다구지에 모시며, 밭1,000평, 논 4마지기, 산 30,000여평을 하사하시었다. 후일 후손이 제실을 지으면서 논 한마지기를 팔고, 나머지 비용은 고성에 사는 일족이 가져왔다한다.
지금 논 3마지기는 다구 마을의 임한택이란 이가 경작하며 1년에 벼(쌀?) 6가마를 시제비용으로 내고, 음력10월 초 여셋날 시제를 모신다고 한다.
원래 조선왕조 시대에는 모든 재산이 거의 국가소유였고, 나머지는 일부 개인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나, 정확한 경계 측량은 왜정 때 시작되어 국가의 지적도가 완성된 듯 하다.
올해 여든이 넘으신 갑자생의 전노인은 9대조부터 이곳에 사시며 이곳 장군의 묘에 대한 정과 사랑과 존경심이 대단하시다.
노인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기억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예부터 장군께서 일찍 전장에서 돌아가시매,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고 어렵게 시제 때만 돌보곤 하다가 수년전에 석물도 도난 되고 했다가, 근간에 마산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도난 당한 석물대신 말쑥한 형태의 석물이 새롭게 자리하였고, 제실은 허물어져 가는데 지방문화재고 하니 곧 보수 또는 중수 되지 않겠느냐며 후손보다 더 희망으로, 관심어린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장군의 무덤에서 바라보는 정면에 자그마한 섬이 있는데 한때는 그 섬을 10억에 사고 팔기로 흥정하는 이야기가 오갔다하나,
후손은 조상의 묘소에 허물어져가는 제실을 ,우리의 정성을 되새기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되돌아 선다.
천근만근 무게에 짓눌린 마음을 추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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