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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6일 일요일 맑음

 

일요일은 대부분의 활동이나 중심은 아이들 위주로 진행되거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여러 가지로 좋다.

그러면서 일단 집을 나서면 먹을 것 볼 것 비용등을 전혀 고려치 않을 수 없다. 지난 일요일은 집에서 가까운 새로 이사하는 창고도 아이들에게 보여 줄 겸 송추를 들렀다.

한참을 젖소랑 놀던 애들이 지루해 할 무렵 송추가마골에서 갈비탕 한 그릇 하고, 이곳은 내가 다녀본 식당 중에서 장사가 제일 잘되는 집이다. 갈비탕 한 그릇에 칠천원인데 애들은 둘이서 한 그릇이면 되고 어른도 고기를 한없이 건져 먹을수 있고 같이 나오는 공기밥 까지는 다 못 먹는다.

간식거리로 계산하면서 이천원짜리 두부과자도 사고, 아침부터 동물원가자고 칭얼대던 애들은 배부르니 별 이견들이 없다. 이제부터 운전대를 잡은 내가 평소 가보고 싶던 곳, 지나가면서 한번 들러야 하지 생각만 하고 지나쳤던 곳으로 차만 운전하면 그만이다.


차를 돌려 옛날 숯을 구워 팔던 동네라 하여 숯가마가 있는 가마골을 지나 기산저수지를 넘어가는 고개턱에 차를 멈추고 애들을 내리라고 하니 배부른 녀석들은 졸고 싶은 눈치다.

집사람도 신발도 불편한데 왜 그러냐고 성화다. 차를 내려 임도를 따라 걸으니 북한산과 도봉산의 뒷 선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인수봉이며 백운대며, 오봉이며 의상봉등 역시 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호사다.

널린 토끼똥을 보며 만지고 냄새맡고, 토끼똥은 왜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막내가 말하면 제일 큰애는 원래 초식동물은 냄새가 적고 고기를 먹거나 동물성 단백질이나 지방등이 분해 될 때 냄새가 많이 난다고 답하며 저들이 학생이고 곧 선생님이다.

애들과 산에 사는 동물이름 말하기며, 산에 사는 곤충이름 말하기는 자연공부고 현장학습이다.


명 모퉁이를 걷다가 되돌아와 차를 타고 고개를 넘는다. 정상에서 멀리 원경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간이 포장마차들이 북적된다.

언덕길을 내려 기산저수지를 끼고 죄회전하면 양주 한우촌이다. 한우를 키우는 곳이 아닌 한우 고기를 먹는곳,

여기저기서 대낮의 고기 굽는 연기인지 벽난로의 난로불인지 모른 연기들을 옆으로 하고 언덕을 올라서면 저수지에 가득한 물을 벗한 때 이른 태공들이 세월인지 고기인지 모를 것들을 낚느라 수면 깊이 안테나를 드리우고, 낚시에 무취미인 우리는 고기대신 푸른 호수물과 낚시꾼을 감상하며 서행한다.

저수지를 내려서면 지금은 파주땅이지만 예전엔 양주땅인 영장리(靈場)리가 나온다. 영장이라는 마을의 이름유래는 유추해 보면 수길원이나 소령원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하며  이곳은 예전에 큰 마을인데 지금은  초등학교도 폐교되고 문화관련 체험학습장으로 운영되고 있다는데 교문엔 자물쇠가 굳게 잠겨있다.


여기서 100여미터를 내려서면 작으마한 다리와 함께 소령원, 수길원이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표지판을 따라 몇몇의 집을 지나면 잘 정리된 아름드리 나무들이 신하처럼 서있다. 차를 한쪽에 주차하고 나무들의 열병을 받기 시작하면 수길원이다. 동쪽언덕에 문화재청의 사전 허락후에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표지판이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신하들이 가로막고 왕의 허락후에 수길원의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듯 자루쇠로 굳게 막고있다.


그럼 이곳의 주인은 누구인가?  연우궁(청와대 옆 칠궁의 궁호) 정빈 이씨는 이준철의 딸로, 영조의 첫번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생모로, 영조에게 승은을 입고 소원(정4품)으로 봉작이 되었고, 아들 효장세자를 낳자 정빈이 되었다.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이미 그의 후궁이 되어 효장세자와 화순옹주를 낳았다. 묘아래 족에 물이 나오고 그래서 흉지라 하여 절손되었다고도 하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묘원의 일을 정성스럽게 하지 않은 날은 꼭 연장이 부러지거나 가벼운 상처를 입는 등  탈이 난다고 한다.


인연이 닿지 않는 길손도 멀리서 목례만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면 왼쪽언덕배기에 격을 갖춘, 거의 왕릉과 다름없는 소령원이다. 능참봉은 어디로 갔는지 여기도 문은 굳게 닫혀있다. 영조가 숱하게 오간 그 길은 지금 내가 밞으며 능지기를 불러 보지만 벼슬이 길손보다 높은 능지기는 길손의 참배를 막는다. 소령원 주인을 영조는 숱하게 릉으로 격상시키고자 했지만 신하들은 “아니되옵니다”를 되뇌었을 것이다.


“소령원은(昭寧園)은 조선21대 영조(英祖) 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원소(園所)이다. 숙빈최씨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1670년(현종 11) 11월6일 태어나 7세에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숙종 44) 3월 19일 춘추 49세로 돌아가 그해 5월 12일 당시 양주땅이었던 지금의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영조는 1725년 (영조 1) 어머니를 위해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해(현재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칠궁(七宮)) 어머니의 신판은 봉안하고 그 옆에 여막을 만들게 하였다.처음에는 소령묘로 불렀으나 1753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개칭하면서 원으로 승격시켰다. 원역(園域)은 산기슭 중단부에 동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뒷편에 담장을 설치하고 봉분의 양쪽으로 석호(石虎)· 석양(石羊)을 각각 2필씩 배치하였다.

봉분 정면에는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대칭으로 배열 되어 있다. 석물들이 전체적으로 간략한 형태를 띠고 있고 사각의 장명등 기둥과 석마(石馬 )의 다리사이가 막혀있는 점등으로 보아 조선후기 석물 형태를 살펴 볼 수 있다. 원소(園所) 아래 동북방으로는 비각 2동이 있으며 동쪽방향으로 중앙에 정자각(丁字閣)과 왼쪽에 수복방(守僕房)이 배치되어 있다.  수복방은 조선시대 원소중 소령원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진입로 초입에는 숙빈최씨(淑嬪崔氏) 의 신도비가 보호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영조의 궁에서의 생활도 초기등 그리 순탄치 많은 않았을 것이고, 누구나 자기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나 그리움 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내려와 차를 돌려 내려오니 여기 저기 나물 뜯는 사람들로 양지 녘 밭 언저리는 가득하고 둘째 녀석은 지난주 냉이캐던 기억을 떠올려 우리도 나물 캐러 가자고 아우성이다. 예전에 보관사가 전면적이 대 불사가 생각나서 이제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마음이 바빠진다.


옮겨온글


고령산 서쪽 능선, 우거진 숲 속에 숨은듯 안겨 있는 유서 깊은절이다. 됫박고개를 너머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큰길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아늑하고 조용하다. 도로변 가까이에 위치한 포크레인 삽 모양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대면 절까지는 걸어서 5∼10분 거리.보광사는 주위를 둘러싼 고령산의 수려한 경치도 볼거리지만 이 사찰에는 조선 영조대왕과 얽힌 얘기와 가치있는 유적과 유물이 많아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둘러보는 게 좋다.

보광사는 원래 신라 진성왕 8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후 고려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그러다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조선 영조 6년에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다시 세웠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절안에 어실각을 짓고 매월 초 벽제원(조선시대 중국에서온 사신들이 묵던 집)에서 됫박고개를 넘어와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어실각 앞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300년 오랜 세월을 지키고 서 있고, 어실각 안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인지 보광사에는 역사 깊은 사찰다운 고풍스러움과 왕실의 원찰(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다운 위엄이 느껴진다. 또 한강이북지역 5대 사찰 중 하나로 꼽혔다는 창건 당시에 비해 절의 규모는 많이 작아졌지만 대웅전과 만세루, 원통전 등이 오밀조밀하게 꾸며져 있어 언뜻 보기에도 꽤 운치가 있다. 아름다운 후원도 보기 좋다.


깨끗하게 정돈된 절 마당 한가운데로 접어들면 퇴색한 단청이 고스란히 남은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대웅보전에는 영조의 친필로 알려진 편액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보광사의가장 큰 볼거리는 대웅전 외벽의 벽화와 목어다. 대부분의 사찰이 대웅전 외벽을 흙벽으로 만드는 데 비해 이곳 벽화는 목판으로 만들어졌으며, 다른 사찰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소재의 그림이 민화풍 3면 벽화로 그려져 있다.


특히 북쪽 벽에 있는 코끼리를 몰고 가는 동자 그림이 눈길을 끈다. 대웅전 맞은편 범종루에 걸린 목어도 흔히 볼 수 없는 명품이다. 대웅전 뜰을 나와 왼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석불 입상을 만나게 된다. 12.5m나 되는 이 석불은‘호국대불‘로 부처님 진신사리와 보석불경 등을 봉안하고 있다.


웅장한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돌을 깎아 만든 정교한 솜씨가 돋보인다. 경내의 약수는 물맛은 물론 법당에 떠놓고 한 달이 지나도 물빛이 변하지 않을 정도로 수질도 좋아 널리 알려져 있다. 석불입상을 본 후에는 비구니들이 수도를 하는 영묘암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오른편 양지 바른 언덕에 있는 ‘연우지석(戀友之石)’으로 가본다.


연우지석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노래가 담긴 비석으로 먼저 가버린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보광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산채정식 등을 파는 토속음식점이 많이 있다.


집사람은 막내가 잠들어 있는 걸 핑계로 차에 머무르고 큰애와 들째랑 절에 오른다, 연우지석에 들러 시도 한연씩 낭송해 보고,  연우지석비 옆에 예전에 실천승가회에서 돌아가신 미전향 장기수인지 양심수인지를 추모하는 비 같은게 주욱 서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잔디만 있고 먼저간 도반을 기리는 비만 외로이 서있다. 수행하는 심신을 쉬는 절도 세속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더욱이나 보광사는 국가의 원찰이었기에 세상사와 더 깊은 관계가 있나보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숲속에서 새들이 날고, 아래 주차장에  두지 못하고 사연을 간직한 채 한걸음에 올라 가는 차들을 쉬엄쉬엄 만나며. 거의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돌다리를 건너, 법당에는 새로 연등을 매다느라 바쁘다. 경내를 한가로이 걷다. 석불상에 참배하고 흰연등을 따라 영각전(靈覺殿)앞에 다다르니 분주히 차를 타고 오신 분들이 많다. 돌아가신분께 참배와 오신김에 부처남도 한번 더 뵙고 애들도 자연스레 부모님을 따라 절에 오고, 깨달음을 얻으러 드신 분들께 잠시 경의를 표하며 안쪽을 기웃거려 본다. 영각전에 드신분을 참배하러 온 애들도 아무 거리낌없이 마치 문지방 하나를 사이에 둔 듯 자연스레 넘나든다.


딸애에게 “얘 돌아가셔서 저렇게 계시니 무섭니?” "아니요“ 이승에서의 자손들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구분되어진 서열과 순서에 따라 .. 발걸음을 돌려 옆의 거대한 석실처럼 된곳을 보니 지하로 된 영각전이다. 여기도 아파트의 프리미엄마냥 강남, 강북, 로얄층, 저층등 돈의 액수에 따라. 하기야 여기서도 선착순 할수도 없고 기준을 두려면 평소의 고인의 덕행보다는 고인이나 후손의 돈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게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일게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흰종이에 써붙인 글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4월9일 부터는 점심공양비 1000원씩 받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흰종이에서 한국불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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